• 2024. 1. 21.

    by. 냉철한부자

    목차

       

      이자의 역사

      이자의 역사는 보기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습니다. 4대 문명 중 하나인 수메르 문명의 현판에 이미 이자 개념이 등장했고, 이후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전에는 상인들이 곡물 포대(18000리터)에 60카(7,200리터)의 이자를 받는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은을 빌릴 때, 이자의 6분의 1이 은 1셰켈에 지불됩니다." 곡물 이자율(40퍼센트)과 은 이자율(16퍼센트)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곡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치가 하락하지만, 은은 그렇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 이자를 받지 말라는 구절을 통해 토라의 세 번째 책인 레비기에 처음 언급되어 있는데, 그 시대에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 자신이 이집트에 400년간 거주했다는 증언에 비추어 보면 이집트에 이자 개념이 존재했음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중세 이후 주로 고리대금업을 하며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이자는 잘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의 경우 모든 것은 나름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서 벗어날 때는 세상이 혼란스러워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때 화폐는 재화의 교환, 즉 가치 척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이자를 교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플라톤은 이자를 붙여 빌려주는 것을 비난할 뿐만 아니라 빌려주는 사람에게 원금 상환을 거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로마 공화정에서 고리대금업이 공화국의 몰락에 기여한 바도 있습니다. 가장이 해외 원정을 갈 경우 서비스 규정에 따라 나머지 가족은 대부업자로부터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양산된 무산층 집단은 원로원파에 반발하는 가이우스 마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등을 지지했지만, 내전으로 공화국이 해체되고 로마 제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설립 후에도 높은 관심을 받았던 대부업은 귀족이나 국민 모두에게 혐오와 혐오의 대상이었고, 국가의 강력한 통제에도 로마의 사업 중 하나로 존속했습니다.

      중세 기독교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경, 랍비와 아버지들의 일치된 의견에 따라 상업적인 대출을 금기시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 고리대금업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는 고리대금업자는 심지어 매장조차 거부당했습니다. 중세에는 창녀와 범죄자들의 매장을 거부당했지만, 그들의 시신은 도살이나 가죽 작업을 거쳐 동물 사체의 잔해가 버려지는 곳에 주로 버려졌습니다.

      그러나 대부업은 지중해에 위치한 이탈리아 상업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14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페루의 시가가 예금을 받아 돈을 빌려주기 시작하면서 현대 은행을 만들었는데, 이 은행은 대출과 유사했습니다.

       

      한국의 이자

      일반적으로 예금 이자는 제1금융 < 제2금융 < 협동조합 순으로 높습니다. 특히 소액인 경우 이자가 더 높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자도 과세됩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이자제한법에 의해 금리가 연 35%를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제되어 왔으나 IMF 위기 이후 긴축정책으로 폐지되었습니다. 다만 대부업체의 경우 대부업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20년 11월 16일 기준 최고 연 20.0%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한편, 민법 제379조의 이자부 사채는 당사자 사이에 다른 법률이나 약정이 없는 한 연 5%의 민사법정이율을 적용받지만, 상사행위에 의하여 상법 제54조에 의하면 사채와 채무에 대하여 연 6%의 법정이율을 적용하고 있습니다.